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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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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哭聲, THE WAILING) 후기

제대로 낚였다, 아니 현혹되었다.





<추격자>, <황해>를 연출했던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곡성>이다.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고, 15세 판정에 대한 논란도 있고, 호불호도 갈리는 스릴러 영화다. 한마디로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 영화다. 또 보기 드물게 20세기폭스 코리아가 배급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시작할 때 20세기 폭스의 로고와 음악이 웅장하게 등장한다. 

<곡성>은 음산한 분위기에서 서서히 또는 급박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흐름,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는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의 특징을 극대화한 배우들의 열연이 이 영화의 포인트다. 주연 배우 곽도원,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는 물론, 아역 배우 김환희까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있음.





<곡성>은 전라남도 곡성(谷城)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영화 제목인 곡성(哭聲)은 동음이의어로, 슬피 우는소리를 뜻하는 한자 단어이다. '곡성'이라는 단어는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모습을 제목에 함축적으로 담기에 안성맞춤이다. 곡성(谷城)에서 곡성(哭聲)이 났으니 말이다. 영화는 비 오는 날 일가족이 살해되는 사건부터 시작한다. 그 이후 비슷한 방식의 연쇄 사건으로 마을이 발칵 뒤집히지만, 경찰은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었다. 결국 집단 야생 버섯 중독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런데 그사이 마을에 퍼진 소문이 있었다. 그 모든 사건이 어떤 외지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외지인은 산골짜기에 사는 일본인이다. 왜 이런 시골에 왔는지, 와서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수상한 소문으로 가득 찬 의문의 인물일 뿐이다. 그러던 중, 종구가 자신의 딸 '효진'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소문의 신빙성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무명'은 일본인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자신이 목격자라고 한다. 하지만 종구는 외지인이 범인이라는 물질적 증거를 건질 수는 없었다. 종구는 그저 심증적 증거만 있기에 외지인에게 떠나라고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효진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자 유명한 무당인 '일광'을 불러서 굿을 시작한다. 굿은 결국 효과가 없었고, 종구는 가족의 생사가 달린 운명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이 순간은 무명의 말과 일광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믿느냐는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지만, 결국 종구는 마지막 순간에 일광의 말에 현혹당해버리고 영화의 막이 내린다. 곡성의 큰 흐름은 사실 이 내용이 전부지만, 영화 곳곳에 디테일하게 놓인 여러 장치가 흥미있는 볼거리이자 복선이다.





곡성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 종교적 색채는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토속신앙이 조화롭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외지인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귀신'이라고 하지만, 부제는 '악마'라고 한다. 귀신이 토속신앙적인 이미지라면, 악마는 기독교적인 이미지다. 외지인이 악마라고 '추측'만 할 때는 인간의 형체로 보이지만, 악마라고 '의심'을 하니 손톱과 붉은 눈의 악마 형체로 보인다. 또 악마의 조력자인 '일광'은 무당으로 등장한다. 무당은 전형적인 동양적 이미지다. 그와 반대로 종구의 조력자인 부제 '양이삼'은 가톨릭의 사제이며, 말 그대로 서양적인 이미지다. 무명은 악마(귀신)과 반대되는 선한 존재다. 동양적 이미지로 보자면 마을의 수호신이고, 서양적 이미지로 보자면 천사다.

이외에도 여러 장치가 많은데, 특히 기독교적인 의미 부여가 많다. 몇 가지 예를 아래에 나열해보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8~39절

이 문구는 영화 시작할 때 자막으로 나오며, 수미상관의 역할을 한다. 시작은 자막이지만, 마지막은 외지인이 읊는다. 기독교적인 의미를 넣자면, 이는 마치 알파와 오메가다.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이자 나중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외지인(즉 악마)는 이 성경 구절을 읊으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안티크라이스트)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외지인이 손바닥에 있는 성흔 모양(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여주며 웃는 모습이 적그리스도적 행동의 증거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장 19절

곡성의 첫 장면은 미끼를 엮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이 부분은 "왜 하필 효진이가 당해야 했냐"는 종구의 질문에 답하는 일광의 대사에서 좀 더 드러난다. 일광의 말에 따르면 효진은 그저 미끼를 문 물고기였을 뿐이었다. 낚시꾼인 외지인은 그저 아무나 걸리라고 낚싯대를 던졌을 뿐인 것이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였던 것이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장 4절

종구는 분노에 찬 상태로 외지인의 집을 찾아가 모든 것을 때려 부순다. 그리고 외지인에게 사흘의 시간을 주며 떠나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사흘의 시간 뒤 일어난 일은 시체의 부활이었다. 마치 좀비같이 묘사된다. 이 역시 신에 대한 부정이며, 악마의 화신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가복음 14장 30절

마지막 무명은 종구에게 닭이 세 번 울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한다. 이 대사는 위의 성경 구절과 닮았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성경 구절이다. 종구는 두 번까지는 의심과 현혹 속에서 버텨내지만, 마지막 세 번째 때 이겨내지 못하고 가족에게 돌아가버린다. 사실 이 닭이 우는 부분은 동양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오래전부터 조상들은 닭을 시보로서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닭이 울면 하루의 시작이며 빛의 시작이기도 하고, 장닭이 길게 세 번 이상 울면 맹수와 잡귀들이 모습을 감춘다고 믿었다.





의문의 세 인물의 정체


외지인의 정체는 보는 그대로 악마이고, 귀신이다. 성경 구절처럼 '신'이 뼈와 살이 있듯이, '악마'도 뼈와 살이 있어 형체가 보이는 것이다. '귀신'이라 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는 영(spirit)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의 모습이 그가 악마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차에 치여 죽은 줄 알았으나 마지막에는 멀쩡히 살아서 동굴에서 회복하고 있다. 외지인은 부제에게 자신의 성흔 모양을 보여주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예수가 동굴에서 부활한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하며 동굴 안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악마는 왜 하필 일본인이었을까. 아무래도 일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평범한 마을에 나타난 수상한 '외지인'이라는 설정이 필요했고, 이는 다른 지방의 한국 사람보다는 외국인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이라 하여 서양인으로 설정했다면, 동서양의 조화를 살리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서양인이라면 '귀신'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기는 조금 어려웠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동양인인 일본인으로 낙점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인이었어도 쿠니무라 준 처럼 연기를 잘했다면 별문제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일광의 정체는 악마(귀신)의 조력자다. 영화 내내 신통한 무당으로 등장하지만, 마지막 결말에서 사진 찍는 모습이 반전이자 그가 악마 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종구의 동료 형사가 외지인의 집을 쳐들어갔을 때 봤던 수많은 사진에서는 크게 두 분류의 사진이 있었다. 미치기 전의 사진과 미친 후의 사진이다. 미치기 전은 외지인이 찍은 것이고, 미친 후의 사진은 일광이 찍은 것이다. 살을 날리는 장면은 외지인의 의식과 교차 편집된다. 일광이 못을 박을 때마다 외지인이 아파하는 모습은, 관객을 현혹시키기 위한 감독의 연출이다. 일광의 살은 효진에게 날린 것이고, 외지인의 의식은 죽은 박춘배를 부활 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면 일광은 언제부터 악마의 편이었을까. 아마도 처음부터 악마의 편이었을 것이다. 일광은 종구의 집에 오자마자 까마귀의 시체를 발견하여 처리한다. 외지인이 까마귀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으로 보아, 까마귀는 일종의 소통 매개체인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가 죽어있었던 것은 무명이 한 짓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에 일광이 도망가는 장면은 관객을 현혹시키기 위한 감독의 미끼다. 사실 자신이 악마 편이기에 무명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망가다가 도중에 나방을 만난다. 나방은 벌레이며, 벌레는 악마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예를 들면 악마 벨제붑(바알세불)이 대표적인 벌레(파리)의 상징이다. 아마도 일광은 나방을 만나며 악마의 기운을 다시 느끼고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현혹시킨다.


무명의 정체는 수호신이자 천사이다. 악마를 추적하며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종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물론 종구는 못 믿었지만, 신비주의 콘셉트 때문에 관객조차 믿지 못하게 현혹 시킨다. 그리고 후반부에 외지인이 차에 치이도록 유도한다. 악마를 방해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종구에게 가족을 살릴 기회를 준다. 하지만 종구는 악마의 꾐에 넘어가 그 기회를 못 살린다. 무명의 이런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 무명이 깔았다는 덫이 무력화되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그중 '금어초'라는 풀이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이 풀은 꽃 모양이 금붕어 입처럼 생겨서 '금어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생기가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시들면 해골처럼 보인다. 이 해골 같은 풀은 영화 초반에 종구가 다른 사건을 조사할 때도 등장한다. 즉, 무명은 그 집도 악마로부터 살리기 위해 노력했었을 것이다.




피해자와 예비 피해자들


대부분의 마을 사람과 언론, 그리고 경찰은 이 모든 연쇄 살인 사건이 독버섯의 환각 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독버섯은 이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진실이 비현실적이기에, 독버섯의 환각 작용이 오히려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설마 독버섯 때문이라고 현혹당한 관객은 없겠지? 만약 이런 의심을 품은 관객이 있다면 나홍진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된다. 인터뷰에서 그는 피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원인을 찾다 보니 그 이유를 현실적인 면으로만 찾을 수 없다고 봐서 이런 오컬트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왜 하필 효진이네 가족이 당했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일광은 그저 피해자가 그저 미끼를 문 물고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명의 답변은 조금 다르다. 먼저 의심해서 타깃이 됐다는 것이다. 종구가 의심을 본격화한 것은 효진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지만, 사실 그전부터 소문에 대해 생각하며 의심의 싹을 틔운다. 어쩌면 이런 의심의 싹이 악마의 미끼이자 피해자가 되는 티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식으로 보면 모든 마을 사람은 사실상 예비 피해자인 셈이다.


곡성의 결말은 종구가 살아있는 듯 죽은듯하며 끝난다. 죽었든 살았든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결국 종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만 한 셈이다. 독버섯에 대한 의심, 외지인에 대한 의심, 일광에 대한 의심, 무명에 대한 의심, 결국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 효진이는 다른 사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처럼 미친 모습으로 을 것으로 보인다. 효진은 종구의 의심에 대한 결과물이자 미끼인 셈이다. 종구의 부인은 죽은 것으로 보이며 장모의 시체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장모도 효진처럼 미끼 역할이다. 일광을 불러서 굿을 행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곡성>은 끝없이 의심을 하게 만들고, 끝없는 미끼로 캐릭터와 관객들을 낚는 영화다. 어쩌면 내 해석도 감독의 미끼에 걸려든 행동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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